얼마 전 PC/콘솔용 '철권7'의 2번째 시즌 업데이트가 있었다. 이날 하루 국내외 게임 관련 커뮤니티는 철권 이야기로 들끓었고 트위치나 유튜브의 실시간 스트리밍 인기 게임 리스트에서 유의미한 순위변동을 볼 수 있었다.
이는 대전 격투 장르가 리듬, 슈팅과 같이 고인물들의 횡포(?)가 심각한 것으로 유명하긴 해도 현시점에서 <철권 시리즈>는 가장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으며 팬덤의 충성도도 굉장히 강하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분명 시작은 3D 대전 액션의 효시격인 <버추어 파이터>을 벤치마킹했다는 느낌을 주는 아류작에 불과했던 철권은 지금에 와서는 버추얼 파이터를 넘어서 지금에 와서는 최고의 2D와 3D를 통틀어 가장 높은 판매고를 올리는 정상급 대전 격투 게임으로 성장했다. 과연 그들의 생존 전략은 무엇이었기에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었을까?
■ 어서 와 이 게임은 처음이니?
4편부터 도입된 벽 시스템은 한 대 떄리고 횡이동을 섞어가며 도망가던 전편까지와는 다른 플레이 양상을 만들었다
매 시리즈마다 청정수(뉴비) 유입을 위한 초보자에게 친화적인 시스템을 제시한 것은 철권의 대표적인 장점이라 할 수 있다.
한 대 때리고 광속 백대쉬로 거리를 벌리는 상대를 잡을 수 없었던 초보자들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4편에서 도입한 '벽맵'은 다른 격투 게임과 같이 벽압박이라는 정해진 틀 안에 갇히는 것을 택하는 가시밭길이긴 했지만 결국에는 조금 더 치열하게 공방을 주고받으며 하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맛깔나는 대전 환경을 만들었다.
상대를 바닥에 튕기거나 날리는 '바운드'와 '스크류' 또한 한 번 상대를 띄운 뒤 내려올 때까지 프레임 단위 기술 연계의 압박에 시달리려야 하는 공중 콤보보다는 비교적 여유있는 타이밍을 요구했기 때문에 초보자들에게는 훨씬 쉽고 재미있게 콤보를 구사할 수 있는 시스템임을 부정할 수 없다.
간단 콤보와 어시스트는 함께 진행한 밸런스 패치와 달리 어느 곳에서도 불만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모습이었다
심지어 최근에는 2D 대전 액션 게임에서는 흔히 '오토매틱'으로 불리는 특정 버튼만 연속 입력 시 지정된 기술을 자동으로 연계하는 간단 콤보와 어시스트 시스템까지 도입했다. 이는 각 캐릭터의 모션과 딜레이만 숙지하여 캐치하는 데 성공한다면 루트가 다소 단순화되는 경향이 있어도 누구나 실수 없이 콤보를 구사할 수 있다. 초보자들도 자기가 상상한 멋진 플레이를 얼마든지 구현할 수 있다는 소리다.
애초부터 이 게임은 날이 갈수록 배워야 할 게 많고 같은 시간 안에 훨씬 많은 버튼 입력을 요구하며 점점 더 시스템이 복잡해지는 다른 격투 게임과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스틱을 몇 바퀴씩 회전시키며 이리저리 크게 굴리지 않아도 되며 약간의 방향 지정과 함께 버튼을 순서에 맞게 입력하는 간단한 커맨드만으로 기술 발동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이 게임의 초보자 친화 노선이 예로부터 지금까지 무엇 하나 변하지 않았다는 증거인 셈이다.
■ 누구에게나 기억에 남을 만한 강한 개성
<스트리트 파이터 시리즈>의 캐릭터는 스테레오 타입에서 벗어난 격투가 캐릭터들을 대거 내놓으며 개성을 찾았다
원래 대전 격투 게임 등장 캐릭터에서 개성을 찾는다면 보통은 캡콤을 1순위에 올려놓는 경우가 많았다. 기름을 온몸에 떡칠하고 상대방을 미끄러지게 해서 제압하는 오일 레슬러나 시작하자마자 백 점프 후 도발부터 하고 나서야 제대로 된 대전이 성사되는 가면 요리사, 세계 대통령을 자청하며 대통합을 주장하는 가짜 엉클 샘 등을 보면 캡콤에서 새로 기획한 캐릭터를 통과시키는 방법이 기획자를 웃게 만드는 것이라는 업계의 농담이 허언으로 들리지 않을 정도다.
3대가 모인 일가의 단란한 가족사진
하지만 시리즈 내내 서로 죽고 죽이는 골육상쟁을 벌이는 막장 중에서도 상막장인 주인공 일가, TV 시청과 암컷 헌팅을 취미로 하며 방귀 한 방으로 대전 상대를 요단강 건너게 하는 괴이쩍은 축생, 맨손 대전 격투 게임에서 진검을 들고나와서는 가면 갈수록 칼부림 대신 검을 활용한 곡예만 늘어나는 모습을 보이는 사이보그 의적을 보면 철권의 참전 캐릭터들도 개성이라면 그 어느 곳에 내놓아도 결코 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러한 개성은 캐릭터들을 한층 매력적으로 만들고 플레이해보고 싶게 만드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오랜 대전 격투 게임 역사에서 비슷한 플레이 스타일을 보여주는 다른 캐릭터들을 제치고 <철권 3>에서 비교적 늦깍이 데뷔를 한 에디나 화랑이 에서 카포에라와 태권도라는 전투 스타일을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 비현실적인 전개 속에 감춰진 현실적이고 치밀한 무술
태권도 구사 캐릭터인 화랑의 모션 캡쳐를 담당한 ITF 태권도 사범 황수일의 모습
대부분의 대전 액션 게임 기술들은 불꽃이나 투기를 쏘아 보내는 장풍, 적을 잡은 뒤 화면 밖으로 솟구쳤다가 땅바닥에 메다꽂기, 제자리에 체공한 상태에서 720도 돌려차기와 같이 기본적으로 허구를 전제로 하는 임팩트 있는 시전 모션에 중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철권에서는 축생이나 로봇과 같은 인외의 존재가 아니고서야 대부분의 기술들이 실제로 존재하거나 수련을 통해 구현이 가능한 것들이다. 당연하게도 실존하는 무술을 기반으로 기술들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실제로 게임 내에서 가문의 피를 증오하여 싸움 방식을 미시마류라는 가공의 무술에서 현실의 일본 전통 무술인 가라테(공수도)로 바꾼 '카자마 진'이 구사하는 가라테의 모션 대부분이 정통 가라테에서 실전되고 있다.
때문에 철권의 현실적인 무술은 연구 자료로도 가치가 충분하다는 게 정설이다. 실제로 많은 무술가와 스턴트맨들이 철권의 무술을 현실에서 재현하는 것에 도전하고 있으며 대전 격투 게임에 관심이 없다가 이러한 영상을 보고 철권에 입문한 사람들의 사례도 종종 볼 수 있다.
유튜버 '에릭 제이콥스'를 일약 스타로 만들어준 '카자마 진'의 공수도 재현 영상
■ 이런 점은 약간 아쉽다
이러한 장점을 많이 가지고 있는 덕분에 충분한 흥행에 성공하긴 했지만 철권의 최근 행보에서는 위에서 말한 장점을 빛바래게 하는 요소들 노출하고 있다.
캐릭터성을 장점으로 내세우고 있으면서 초보자를 배려한다고 '모르면 맞아야죠' 식의 패턴형 캐릭터들을 후속작에서 배제했으면서 뜬금 없는 게스트 캐릭터들의 참전으로 게임 내의 생태계를 완전히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는 이율배반적인 행보를 보여준 것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형이 거기서 왜 나와요 싶은 수준의 뜬금없는 참전은 안 좋은 쪽으로 여론이 통일되는 결과를 낳았다
통칭 고엘기녹(고우키, 엘리자, 기스, 녹티스)으로 약칭하는 이 신규 캐릭터들은 원거리에서 쉬이 적의 반격을 허용하지 않는 장풍 계통의 기술들을 보유하고 있어서 압박 능력이 탁월하며 기를 모으지 않아도 가드 대미지가 있어서 밸런스 측면에서 문제가 많다.
심지어 이들은 게스트 캐릭터 주제에 슈퍼 콤보, 초필살기 게이지 등 철권이 아닌 다른 게임에서의 시스템을 그대로 들고와서 제작진들이 그렇게 싫어한 '모르면 맞아야죠'를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
게다가 이들은 게임 내 스토리 전개에까지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 게임이 <스트리트 파이터 X 철권>과 같은 크로스물이나 <마블 VS 캡콤>과 같은 배리어블 시리즈라면 크게 상관이 없겠지만 막장의 끝을 보여주는 화끈한 맛에 약간의 개그 테이스트를 첨부한 철권 특유의 스토리를 즐기던 사람들의 입장에서 뜬금없이 원래 잘 활동하던 캐릭터들을 전부 실직시키고 새로 추가한 굴러들어온 돌이 이야기의 주역이 됐다면 누가 고운 시선을 보낼 수 있을까?
본편에서 등장 횟수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고우키는 존재감이 너무 커서 철권의 개성을 약간 희생시킨 느낌이 있다
■ 철권의 생존전략에 대한 총평
철권을 소재로 고인물들이 지배하고 있는 게임의 문제점을 지적한 만화의 한 장면
철권은 흔히 말하는 인터넷 신조어인 '고인물'과 가장 많이 엮이는 게임 시리즈다. 원래 고인물이라는 단어부터가 특정 게임에 완전히 통달한 헤비 유저들에 대해 게임에 무수한 시간을 쏟았을 그들의 노력에 대한 경탄과 함께 반쯤 조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단어지만 고인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게임이 적어도 그 정도 수준의 헤비 유저층을 꾸준히 유지할만한 잘 만들어진 작품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철권이 이토록 잘 만들어진 게임 시리즈로 25년이나 살아남아 올 수 있었던 생존의 비결은 이러한 후속작 전개와 신규 콘텐츠 보강 과정에서 보여준 과감함과 남다름에 있다. 지금까지 나열한 이들의 장점도 단점도 결국에는 모두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걷는 거침없는 행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완성된 철권의 생존 전략은 시리즈가 전개될수록 초보에게 더욱 친절해지는 대전 환경, 가끔은 광기까지 느껴질 정도로 개성이 넘치는 캐릭터 그리고 지나가던 사람도 한 번쯤은 돌아보게 만든다는 실전 지향형 무술 연출을 통해 뉴비, 고이다 못해 썩은물은 물론 현실에 충실한 인싸까지 모든 플레이어의 의향을 완벽하진 않아도 조금씩이라도 만족시키는 방향이었다.
<철권 시리즈> 캐릭터는 마냥 멋지고 이쁘다기보다는 기묘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더욱 기억에 남는다
비록 장르가 다르다고 할지라도 고인물 문제를 앓고 있는 모든 게임들에게 있어 철권은 배워야 할 점들을 충분한 제시하고 있는 롤 모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