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으레 오타쿠들 사이에서 그 농도의 짙음을 의미하는 지표인 '덕력'의 논할 때 서로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쓰는 단어가 '진짜'와 '가짜'다.
울타리 바깥에서 본다면 결국 다 똑같은 오타쿠니까 여기에서 구분을 짓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싶겠지만, 적어도 오타쿠임을 자처하는 이들은 자신이 애정하는 콘텐츠를 얼마나 고들었는지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서브컬처를 대할 때 무수히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며 더 깊이 알고 이해하기를 원한다.
때문에 오타쿠들이 모여서 게임을 만들게 되면 그 결과물은 자신의 취향과 사심을 듬뿍 담아서 '이것도 있으면 좋겠다', '저것도 있으면 좋겠다'며 대중성에서 엇나간 방향으로 폭주하기 쉽지만, 여기서 역발상으로 철저하게 오타쿠들을 공략하는 테마파크를 표방하면 어떤 게임이 나올까?
'벽람항로'로 이름을 서브컬처 시장에 이름을 널리 알린 '만쥬게임즈'가 '넥슨'을 통해 한국 서비스를 준비하며 최근 CBT를 진행한 '아주르 프로밀리아'가 아마 그 좋은 사례가 되지 않을까 싶다.
'아주르 프로밀리아'는 이전에 개발사가 선보이고 준비했던 전작들과 동일하게 작품명에 아주르(Azur, 남색)이라는 키워드가 들어가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밀리터리 요소에 미소녀 코드를 조합한 해당 작품들과는 결이 크게 다르다.
작풍 자체는 총포와 과학기술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이 또한 엄연히 마도를 기반으로 하는 판타지 월드로 일반적인 모습의 인간보다는 동몰귀나 뿔, 날개가 달린 아인종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때문에 게임 시작부터 이름 말마따나 별의 궤적을 타고 내려온 '성림자'의 특이성은 크게 부각된다. 으레 이러한 부류의 작품에서는 숨겨진 능력 내지는 반드시 이뤄야 할 사명을 통해 주인공의 기이함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지만, 아주르 프로밀리아 내에서는 오히려 주인공이 동화처럼 그려진 메르헨 세계관에 뚝 떨어진 아무런 특징이 없다는 인간이기 때문에 초반 전개는 물론 주요 등장인물들과 관계를 맺어나가는 것도 이러한 요소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주인공이 바깥 세상에서 온 이방인임을 표현하는 방식이 제법 신선하다

일반적으로는 아인종이 인간보다 훨씬 튼튼하지 않나 싶긴 한데
전반적인 스크립트를 보면 진부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판에 박힌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렇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과정 속에서 캐릭터 하나하나의 매력포인트만큼은 제대로 어필하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메인 스토리 내에서 이미 얼굴을 비추며 활약하는 캐릭터는 물론, 일단 플레이어블로만 접해볼 수 있는 캐릭터들조차도 말버릇이나 움직임과 같은 구성요소 하나하나에 겹치는 부분 하나 없도록 개성을 부여하고 있으며, 매우 부드럽고 수준 높은 표정과 동작 묘사를 통해 소위 말하는 서브컬처 게임의 트렌디 코드라고 할 수 있는 '말랑쫀득함'을 정말 잘 구현해냈다.

로딩 화면부터 느껴지는 폭력성(?)이 심히 대단한 수준이긴 하지만

자연스레 아빠 미소가 지어지는 말랑쫀득한 귀여움도 공존한다
특히 모에 코드의 접근 방식에서는 정말 ‘뒤가 없다’ 싶을 정도로 과감한 연출이 눈에 띄었다. 격렬한 움직임이 수반되는 탐험과 전투 상황에서는 굳이 로우 앵글을 의도하지 않더라도 의상 연출과 캐릭터의 움직임 표현이 상당히 적극적으로 구현되어 있으며, 신체의 흔들림이나 천 재질의 물리 표현 또한 높은 강도로 적용되어 있다.
물론, 이러한 묘사에 의도가 담겨 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다만 중요한 것은 아주르 프로밀리아의 연출이 단순히 자극적인 장면으로 시선을 끌기 위한 방향으로 흐르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소위 말하는 '어흐'한 장면들을 액션의 동세에 자연스럽게 녹여내고 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불쾌함을 유발하거나 과도하게 작위적이라는 인상은 비교적 적은 편이다.
애초에 유니콘을 탄 창기사가 복장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제대로 돌격하지 못하거나, 고지대의 궁수가 노출을 신경 쓰느라 안정적인 사격 자세를 포기하는 것 또한 현실성과는 거리가 먼 연출이다. 그런 점에서 아주르 프로밀리아는 노골적인 표현 직전에서 절묘하게 수위를 조절하면서 서브컬처 장르 특유의 감성과 액션 연출 사이에서 비교적 안정적으로 줄타기를 해냈다는 인상을 남겼다.

일부러 보여주려는 게 아니라 안정적인 사격 자세인 '앉아 쏴'를 구사하기 위함이다

물론 로우 앵글로 일부러 보는 것을 굳이 막지도 않고 있다
오히려 이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가장 놀랐던 부분은 바로 필드 플레이였다. 월드맵을 구획으로 나누고 소위 말하는 파쿠르(등반)을 지원하지 않으며 채집과 건설과 같은 생활 요소의 비중이 제법 높은 샌드박스 스타일의 ARPG를 표방하고 있었기에 필드 플레이가 다소 가볍고 심심할 것이라는 우려와 달리, 근래 접해본 서브컬처 게임 중에서는 최고 수준의 자유도와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가령 도처에 깔린 목재, 광석, 열매 등의 채집 요소를 두고 보더라도 샌드박스 게임이라면 그에 걸맞게 제작이라는 과정을 거쳐 '채집 요소에 맞는 도구'를 반드시 갖춰야 한다고 선입견을 가지기 쉽지만, 아주르 프로밀리아에서는 시간이 조금 더 오래 걸릴 뿐이지 다른 오픈월드 게임에서 으레 사용하던 '공격'이라는 상호 작용을 통해서도 채집이 가능하며 일단 필드에 재료가 떨어지면 굳이 이를 주우러 갈 필요 없이 자동으로 입수되는 사양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캐릭터가 기본적으로 2단 점프가 가능하고 3번까지 연달아 대시가 가능하며 대시를 전부 사용하면 쿨타임 3초가 찍히긴 하지만 이 3초가 지나면 대시 스톡이 3회 전부 회복된다. 심지어 스태미너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대시 버튼을 유지하면 같은 자원의 제약 없이 달리기 상태로 필드를 돌아다닐 수 있으며 관성이 적용되는 대시 점프로 일반 점프보다 더 높이 더 멀리 도약하는 것도 가능해 파쿠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불편함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상호작용으로도 공격으로도 채집이 되는 것처럼 대부분의 필드 플레이는 상상할 수 있는 대부분의 방식을 구현해놓았다

비행 타입의 키보를 잡으면 이른 타이밍에 날틀을 갖출 수 있어 파쿠르가 없더라도 고지대 탐사가 곤란하지도 않다
전투 또한 비슷한 기조다. 팀에 편성된 3명의 캐릭터가 할당된 '전략 직업군'과 '속성 상성'의 우위를 살려서 전투한다는 개념은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이지만 대시와 별개의 방어 수단으로 패링이 존재하며 적 대상의 공격 패턴 발생에 대해서는 색이 다른 워닝 사인과 경고음으로 명확한 전조와 구분을 넣어 캐주얼하면서도 화려한 전투를 구현해냈다.
특히 전투 인터페이스는 플레이어에게 상당히 많은 편의성을 제공하고 있는데 화면 밖에서 인지하지 못한 공격이 날아드는 경우에는 화면 전체가 번쩍이는 점멸 연출로 경고를 하고 그 패턴의 종류에 따른 색조가 워닝 사인과 동일한 형식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대시와 패링을 통해 대처할 수 있으며, 패링이 가능한 패턴은 대시로도 반응할 수 있는 등 방어자원을 적절하게 배분하는 유연한 플레이도 가능하다.
심지어 모든 원거리 캐릭터는 무려 무빙샷을 지원한다. 기본적으로 자동 조준에 사정거리 내에 들어가 있다면 히트 스캔 방식으로 즉시 공격 판정이 발생하거나 최소한 투사체가 유도되는 방식인데 공격 버튼을 유지하면서 상하좌우 버튼으로 미세하게 위치를 조정할 수 있다 보니 조작하는 입장에서는 생각한 그대로 부드럽게 캐릭터가 움직이는 쾌적한 액션 경험을 누릴 수 있다.

축맞춤이나 위치 선정의 문제로 인해 전투의 맥이 끊기기 쉬운 원거리 캐릭터도 꽤나 다이나믹한 전투가 가능하고
하늘에서 급습하는 것처럼 화면 밖에서 날아드는 공격도 침착하게 의식하면 충분히 받아 칠 수 있다프로밀리아 세계관의 핵심이자 생활 및 전투에서 다방면으로 사용되는 펫 시스템인 '키보'는 이 게임의 매력에 방점을 찍는 요소다.
필드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키보는 스타 링크라는 포획 방식으로 파트너십을 맺을 수 있으며 이 계약의 과정은 높은 등급의 스타 링크를 사용하면 포획 확률이 올라가고 체력을 깎아내서 저항 확률을 낮추는 매우 익숙한 방식으로 이뤄지는 것이 특징이다.
파트너가 된 키보는 팀에 편성하여 전투를 돕는 것은 물론 월드 곳곳에 설치한 전초기지와 채집 포인트에서 알아서 재료를 수급하고 물건을 만드는 하우징 요원으로도 쓰일 수 있으며 이를 적절하게 배치하는 것으로 많은 공정을 자동화하여 편리하게 게임을 풀어나갈 수 있다.
일반적인 펫은 도감을 채우고 보상을 받으면 거기서 더 건드릴 이유가 없지만 아주르 프로밀리아에서는 필연적으로 키보에 많은 시간을 태울 수 밖에 없다. 수집할 키보의 종류가 기본적으로 많기도 하지만 각 키보에게 할당된 기본적인 속성과 기술 배치 외에는 모든 요소가 무작위성을 띠기 때문에 성장과 진화 그리고 돌연변이와 같은 모든 변수를 거쳐가며 이상적인 특성과 능력치를 가진 키보를 완성하는 것이 이 게임의 진정한 엔드 콘텐츠가 되지 않을까 싶다.

옵션이 덕지덕지 붙었지만 페널티 특성이나 무효옵인 얼음 속성 강화 특성도 있기 때문에 개체값 노가다가 필요하다

이런 부류의 게임에서 통칭 '이로치가이'로 불리는 '이색(색이 다른 개체)'은 성능적으로 차이가 없더라도 가치가 높다
'아주르 프로밀리아'라는 작품은 어지간히 깊게 파고들지 않는다면, '만쥬게임즈'라는 오타쿠 개발자 집단이 자신들이 좋아하는 익숙한 요소들을 무분별하게 쏟아 넣은 결과물처럼 보이기 쉽다.
특히 게임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의 콘텐츠가 빠르게 해금되고, 짧은 시간 안에 방대한 정보와 시스템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구성은 이런 장르를 익숙하게 접해온 이용자 입장에서도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우선 타입 상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하고 특성과 기술 배치를...
하지만 실제 플레이를 이어가다 보면, 그 과정 속에서도 개발진이 ‘서브컬처 이용자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에서 스트레스를 받는지’를 굉장히 세밀하게 분석하고 다듬었다는 흔적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수많은 서브컬처 게임들이 취향의 집약체를 표방하면서도 실제 플레이 단계에서는 피로감과 불편함을 방치했던 것과 달리, 아주르 프로밀리아는 이용자 경험을 최대한 쾌적하게 만들기 위한 고민이 전반적인 시스템 설계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었다.

일반적인 필드 퍼즐은 기믹 수행을 위해 캐릭터 편성을 바꾸는 수고를 요구하지만 이 작품에는 프리셋 기능이 있다
게임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요소에서는 ‘이런 방식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 플레이가 실제로 구현되어 있었고, 제한은 적은 반면 선택지는 넓었다. 그 과정에서 이용자 편의성 또한 놓치지 않고 있었기에, 아마 수많은 성림자들은 4일이라는 짧은 CBT 기간 동안 방대한 콘텐츠를 경험하면서도 그 모든 것들이 유쾌한 기억으로 남았을 확률이 높다.
물론 아직 CBT 단계인 만큼 아쉬운 부분도 존재한다. 인게임 스크립트의 가독성이 다소 미완성 상태에 머물러 있거나, 스토리 몰입을 보조할 한국어 음성 지원이 부재한 점은 분명 향후 개선이 필요한 요소다.
리뷰 기사를 쓰면서 한국어 더빙 없는 게 살짝 아쉽다고 적으려 했더니 양반은 못되는 것 같다
다만 지난 16일 공식 채널을 통해 한국어 음성이 포함된 프롤로그 애니메이션 컷신이 공개된 만큼, 정식 서비스 단계에서는 한국어 더빙 지원이 이뤄질 가능성 또한 상당히 높게 점쳐지고 있다.
부디 만쥬게임즈가 이번 CBT에서 보여준 집착에 가까운 디테일과, 넥슨이 오랜 기간 축적해온 서비스 운영 노하우가 좋은 시너지를 만들어내길 바란다. 적어도 이번 테스트는, 프로밀리아 세계를 단 4일 만에 떠나보내기에는 너무나도 아쉬우니 말이다.
[신호현 기자 hatchet@chosun.com] [gamechosu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