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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그런트 | 2022-01-04 11:58
신정동의 악마로 불리웠던 짤짤이의 달인.
주말마다 원정을 다니며 이곳 저곳의 지역별 스타일에 대한 파훼법마저 마스터한 나.
모든 격투게임을 통달하여 처음 잡아보는 게임으로도 상대방을 제압하는 심리전의 달인
능수능란한 손가락 컨트롤은 골든핑거 저리가라급
상대방과 대전이 시작하기 전 전의를 상실시킬 수 있는 거침없는 입담
분노한 상대방의 체어샷도 가뿐하게 피할만큼 운동능력은 최상
중1때부터 성인비디오 대여가 가능했던 압도적인 피지컬
게다가 매력만점 인기남이였던 나는 항상 여자들과 함께 다녔기 때문에
아직 여자랑 뽀뽀는 커녕 손도 못 잡아본 허접들이 상대가 될 리 없었다.
나는 무료했다.
아무도 내가 플레이하는 기기에 돈을 넣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나는 게임잡지를 통해 알게 된 신규 KOF 시리즈 런칭과 대회 소식.
물론 이미 신규 kof가 들어와 있던 업소도 있고 잡지를 통해 여러가지 정보가 알려져 있었으나
전국의 은둔고수들이 모여드는 대형 이벤트이기에 나의 심장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강변 테크노마트 몇 층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희미하게 창문 밖으로 보이는 한강이 보이는 대 연회장
그곳에는 비장한 표정을 한 남자 녀석들로 인산인해였다.
삼삼오오 모여 웃고 떠드는 녀석
혼자서 손가락을 풀고 있는 놈
벼락치기라도 할 양 기술집을 보고 있는 놈
긴장감을 풀기 위해 턱을 돌리며 스트레칭 하는 놈들
그곳에 긴장감이라고는 1도 없이 여자친구를 데리고 거들먹거리고 있는 녀석이 나였다
사실 여자친구라고 하기도 좀 애매하긴 했다.
내가 다니던 합기도장의 신규 회원이였는데 나의 친절한 외모와는 다른 사악한 킥력에 반했거나
큰 덩치에 비해 날렵한 제비돌기에 반했거나
뭐 그건 중요한 것은 아니였다. 아무튼 일.방.적으로 교제를 당했기 때문에
소란스럽던 대회장은 스피커의 찢어지는 노이즈에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드디어인가..
이내 사회자의 안내 멘트가 시작되었고 진행요원의 안내에 따라
남자녀석들은 2열로 줄을 서기 시작했다.
다들 서로의 상대가 되는 녀석을 파악하기 위해 눈알을 요리조리 굴리고 있었다.
악수를 청하는 녀석도 있었고 겁을 주기 위해 인상을 쓰는 놈도 있었다.
나는 내 옆의 녀석을 신경쓰지 않았다.
사자는 그 존재만으로도 사자이기 때문이다.
내 눈에는 오로지 왕좌만 보일 뿐.
상품으로 주는 네오지오를 팔아 그 돈으로 뭘 할까로 머리속은 가득했다.
내 차례가 되어 테스트 삼아 스틱을 가볍게 튕기며 캐릭터를 이리저리 골라보던 중
나는 스틱이 대각선 아래로의 입력이 잘 되지 않음을 감지했다.
손을 들어 우리 기기의 진행요원을 호출하여 대각으로 잘 안된다고 이의를 제기했으나
동공 지진이 일어난 진행요원
아뿔싸
나보다 두 어살 많은 여대생이 이해할 리 없는 대화인가..
저 빨리 진행해야 하는데요. 라는 말만 되풀이하는 여대생과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내 스틱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괜찮은 것 같다고 어서 경기를 속행하라는 대전상대.
시발.. 저 녀석은 쥐가 아니라 하이에나 였던 것이다.
사자가 약해지기를 기다렸다 부랄부터 뜯고보는 사악한 하이에나
냉철하게 마음을 다잡은 나는 묘안을 생각해냈다.
"내가 2p에서 할테니까 그쪽에서 1p할래요?"
"싫은데요?"
개새끼...
그래 이까짓 대각선이야..
저 딴 녀석은 가뿐하게...
하지만 내 기대와는 다르게 집요하게 하단만 거는 녀석의 공격으로 나는 패배했다.
그 뒤로 나는 kof를 하지 않고 있다.
요즘 밸게녀석들이 격투게임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오랜만에 내 가슴속 잠들어 있던 격투엔진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이십여년전 치욕을 다시 맛볼수 없어 부랴부랴 에뮬을 받고 kof 롬을 받았다.
키보드로 한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스무스한 콤보
물론 예전보다는 많이 떨어졌으나
가벼운 손가락 터치.
프레임을 읽어내는 동체시력.
하지만 나는 에뮬을 다시 지웠다.
잠깐 옛 추억에 잠겨 그때 그 시절 뜨거웠던 나를 생각해낸 것으로도 충분했던 걸까.
불타는그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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