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 북동쪽 황량한 사막에 '세켐'이라 불리는 개간사업이 시작됐다.
세켐 사업은 많은 인력과 비용을 들여 지평선까지 사방 모래밖에 없는 땅에 우물을 파고, 퇴비를 뿌리고 유기농과 바이오 농법을 적용했다. '낭비다...'라고 세계가 이 사업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이집트는 꾸준히 우물과 퇴비와 농법을 적용해 2015년에 이르러선 2000헥타르(축구장 약 2800개 크기)의 농경지를 복원했다.
가능성을 믿고 무려 40년을 투자한 꾸준한 노력이 사막을 옥토로 바꾼 셈이다.
![[창간] 16년간 개간한 사막에 핀 600만 개의 꽃…펄어비스가 만들어낸 '비옥한 토양'](https://www.gamechosun.co.kr/dataroom/article/20260911/225155/109883_1789052956.png)
1977년 황량한 사막에서 시작한 세켐 농장 초기 모습(왼쪽)과 수십 년간 토양을 개량한 뒤의 모습(오른쪽).
출처=SEKEM
출처=SEKEM
기자는 세켐 사업을 보면 펄어비스가 떠올랐다.
펄어비스는 한국 게임사 가운데서도 꽤 특이한 이력을 가진 회사다. 남들이 이미 검증한 길보다 스스로 필요하다고 판단한 길을 서슴없이 선택했고, 또 남들이 뭐라하든 그 길을 꽤나 우직하게 개척하는 회사다.
이런 성향은 창업자 김대일 의장의 개발 철학에 꽤 큰 영향을 받았다. 창업자 본인이 한 명의 개발자임을 강조한 개발자 중심의 사풍이 최대 특징으로 '집요', '야성', '신뢰'를 핵심 가치로 내세우며 높은 기준을 세우고 끝까지 문제를 해결하는 개발 문화가 뿌리 깊게 잡혀있다.
김대일 의장 본인이 게임 제작과 신규 프로젝트 개발에 집중하기 위해 자신이 창업한 회사의 대표이사 자리를 스스로 내려놓고 개발 총괄 프로듀서 역할을 이어가고 있을 정도니 말이다.
그리고 그 사풍의 중심에는 창업 첫 작품 '검은사막'부터 일찌감치 자체엔진을 사용한 것을 보면 명확히 드러난다.
언리얼 엔진 같은 상용 엔진이 제공하는 개발 속도와 경제성보다, 자신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게임을 보다 정확하게 구현하겠다는 의지의 산물이 펄어비스의 첫 자체 엔진 '검은사막 엔진'이었다.
그리고 등장한 게임이 2014년 등장한 검은사막이다. 검은사막은 출시 초반 복잡한 UI와 높은 진입장벽, 서버 불안과 버그 등 적지 않은 비판을 받았지만 화려한 그래픽과 액션성, 방대한 생활 콘텐츠라는 MMORPG가 가져야 할 뼈대만큼 튼튼하다는 평가를 획득했다.
검은사막 등장 이후 펄어비스의 선택은 신작이 아닌 명작 만들기였다. 10년이 넘는 기간동안 매주 크고 작은 개선을 이어가면서 1년 주기로 대규모 신규 지역과 대륙을 추가하는 길고긴 강행군을 이어간다. 그리고 그 행군은 지금도 진행 중이기도 하다. 그 와중에 2018년 8월 그래픽과 사운드를 대폭 업그레이드한 리마스터까지 적용했다.
2018년과 2020년 '검은사막 모바일'과 배틀로얄 장르 '섀도우 아레나'를 출시한 것을 제외하면 펄어비스는 여전히 검은사막을 깎고 또 깎고 있었다. 검은사막 모바일과 섀도우 아레나마저 검은사막에서 뻗어나온 작품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지난 10여 년의 펄어비스는 그야말로 ‘검은사막 깎는 노인’이라 불러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펄어비스의 역사는 검은사막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펄어비스가 이 엔진 하나를 계속 고쳐 쓰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검은사막을 장기간 서비스하며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2019년 5월 차세대 프로젝트를 위한 새로운 자체 엔진 '블랙스페이스 엔진'을 다시 개발했다.
블랙스페이스 엔진은 기존 검은사막 엔진을 단순히 개량한 수준이 아니라 같은해 11월 발표한 신작, 붉은사막과 도깨비, 플랜8처럼 서로 다른 장르와 플랫폼을 염두에 두고 새롭게 설계한 차세대 엔진이다.
펄어비스는 블랙스페이스 엔진을 통해 상용 엔진의 편리함을 포기한 대신 기술력과 개발력을 회사 내부에 남기는 장기적인 투자를 이어가겠다는 회사 정체성을 다시한번 드러냈다. 그리고 그 결실은 7년 후인 2026년 붉은사막을 통해 비로소 증명해냈다.
붉은사막에서 드러난 블랙스페이스 엔진의 강점은 단순히 뛰어난 그래픽에만 있지 않다. 광대한 오픈월드와 수많은 오브젝트의 상호작용을 동시에 처리하면서도 높은 수준의 비주얼과 멀티플랫폼 대응을 함께 구현했다.
특히 자체 엔진의 가장 큰 장점은 특정 그래픽 효과보다 게임 전체를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게임에 필요한 기능이 없다면 엔진 단계부터 추가하고, 제작 도구와 개발 파이프라인 역시 프로젝트에 맞춰 직접 조정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펄어비스가 지난 16년 동안 내놓은 게임이 적다는 사실도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검은사막'과 '검은사막 모바일', '섀도우 아레나', 그리고 '붉은사막' 정도가 출시작의 전부다. 게임 숫자만 놓고 보면 신작 개발이 느린 회사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 개발 속도는 꼭 그렇지만도 않다.
검은사막은 자체 엔진 개발까지 병행하면서 회사 설립 약 4년 만에 서비스를 시작했고, 붉은사막 역시 출시 직후 조작과 시스템에 대한 이용자들의 불만이 이어지자 5개월도 되지 않아 17차례 패치를 적용하면서도 7개월 만에 대형 DLC 출시까지 밝힌 것을 감안하면 그 속도는 오히려 엄청나게 빠르다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출시 6개월 만에 600만 장 판매라는 성과로 돌아왔다. 펄어비스는 느린 회사가 아니라 만족할 때까지 만드는 회사라는 사실을 창립 16년 만에 스스로 증명한 셈이다.
참 오래 걸렸다...

깎고 깎고 또 깍아 피어난 600만 개의 꽃
펄어비스의 고집에 가까운 개발 정신은 꽤 많은 비판을 받아온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몇몇 비판은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고집 속에서 다른 게임사가 이루지 못한 여러 개척에 성공한 것도 사실이다.
이제 펄어비스가 오랜 시간 축적한 기술과 개발 노하우는 다음 작품들을 향하고 있다. 오픈월드 액션 어드벤처 '도깨비'와 엑소수트 MMO 슈터 '플랜8'이 그 다음 시험대다. 두 작품 모두 블랙스페이스 엔진을 기반으로 개발 중이며, 붉은사막과는 또 다른 장르와 게임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지난 16년 동안 펄어비스의 시작과 현재에는 공교롭게도 두 개의 사막이 놓여 있다. '검은사막'에서 출발해 '붉은사막'에 도착하기까지, 펄어비스는 게임과 기술이라는 우물을 지독할 정도로 파고 또 팠다.
그 결과 검고 붉은 두 사막은 이제 펄어비스라는 회사를 떠받치는 옥토가 됐다. 붉은사막에서는 600만 장이라는 꽃까지 피웠다.
이집트의 황량한 사막을 수십 년 동안 일군 세켐처럼 펄어비스 역시 당장의 결실보다 자신들이 믿는 개발 방식과 기술에 오랜 시간을 투자했다. 모든 선택이 항상 옳았던 것도, 그 과정이 순탄했던 것도 아니지만 우직하게 걸어간 노력은 쌓이고 쌓여 결국 다음 작품이 자라날 토양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옥토에는 이제 '도깨비'와 '플랜8'이라는 새로운 씨앗이 심어져 있다. 16년 동안 사막을 갈아온 펄어비스가 이번에는 무엇을 피워낼지, 기자로서는 사뭇 궁금해진다.

16년의 개척 끝에 태어난 옥토. 그리고 여기에 심어진 차기작
[배향훈 기자 tesse@chosun.com ] [gamecho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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