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조선이 처음 세상에 나온 1999년. 지금의 게임은 같은 취미라고 부르는 것이 어색할 만큼 많은 것이 달라졌다. 게임을 사는 방법부터 정보를 얻는 과정, 친구와 게임을 공유하는 방식까지 당시에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던 일들이 이제는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 됐다.
21세기를 눈 앞에 둔 1999년. PC통신에 접속하며 최첨단 시대라고 생각하며 살던 17세 고등학생 '철수'는 어떤 게임 라이프를 가지고 있었을까?
검색 한 번에 최저가가 나오지도 않고 클릭 몇 번으로 게임을 내려받을 수도 없고 온라인 결제는 꿈도 꾸지 못했던 시절이지만 그들도 어디선가 정보를 얻었고 어디선가 게임을 손에 넣었던 시절이다. 지금은 보면 우습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당시를 살던 우리는 스스로 '우리는 최첨단 시대에 살고 있다' 믿고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처음 보는 과거이고, 누군가에게는 까맣게 잊고 있었을 수도 있는 1999년 9월 11일 토요일의 모습을 살짝 살펴보자.
![[창간] 27년 전 1999년 추억 이야기, 17세 철수의 용산 가는 날](https://www.gamechosun.co.kr/dataroom/article/20260910/225149/423641_1789033654.png)
이 글은 기자의 경험과 추억이 풍부하게 들어갔지만 어디까지나 픽션입니다
그림=AI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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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9월 11일 토요일
인천에 사는 17살 고등학생 철수에게 오늘은 꽤나 중요한 날이다. 몇 달 동안 조금씩 용돈을 모은 끝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파랜드 택틱스3'를 사러 용산에 가는 날이기 때문이다.
철수는 전작인 '파랜드 택틱스2'를 꽤나 재미있게 즐겼었다. 적 뒤통수 잡겠다고 한 칸씩 위치를 재는 전략성과 카린의 이프리타가 화면을 뒤덮는 화려한 연출은 철수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 있었다. 뭐... 카린의 목욕신도 빼놓을 수 없었고 말이다...
어찌됐든 이번에 3편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꼭 사야겠다고 생각해 꽤 오래전부터 바짝 용돈을 모아오고 있었다. 게임이 발매된진 꽤 시간이 지났지만 철수는 '신작 게임을 절대 발매일에 사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다. 아무리 기대되는 게임이라도 꼭 몇 달 정도 기다린 후 게임을 구입하는게 철칙이다.
2년 전 온갖 게임 잡지에서 초 A급 한국 RPG가 나온다고 그렇게 호들갑 떨던 '포가튼 사가'를 발매일에 덜컥 샀다가 큰 봉변을 치뤘기 때문이다.
온갖 버그로 게임 플레이도 못하는 지경이었지만 당시엔 어떤 문제인지도 몰라 애꿎은 모니터만 열심히 때려가며 원망을 터뜨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포가튼 사가는 이후 몇 달에 걸쳐 10여 차례가 넘는 패치가 나온 후에야 그나마 정상적 플레이가 가능해졌지만 인터넷도 제대로 없던 세상에서 순전히 입소문만으로 똥겜이라고 파다하게 퍼져 가격은 반토막이 된 이후다.
철수는 어린 나이에 돈과 시간을 듬뿍 써서 스트레스를 산 경험을 얻었고, 강력한 게임 구매 철칙이 생겼다. 아무리 기대하던 게임이라도 나오자마자 덥석 사지 않고, 게임잡지 공략과 친구들의 평가가 어느 정도 쌓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사는 것.
2026년식으로 표현한다면 출시 직후 스팀 평가가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는 셈이다. 스팀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도 모르던 17살 철수는 이미 몸으로 '존버 구매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이번 주말은 파랜드 택틱스3를 위해 통째로 비워뒀다. 물론 현장에서 마음이 바뀌어 전혀 다른 게임을 살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파랜드 택틱스3가 내 마음 속 1순위다. 아무튼 뭔지는 몰라도 토요일 오후에 내 오른손에는 새로운 게임 하나가 들려있을 예정이다.
매주 토요일 학교가 일찍 끝나면 친구들과 함께 선생님 눈을 피해 학교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이티 오락실까지 원정 가는 약속도 취소했다. 이번 주말은 큰 이변이 없는 한 파랜드 택틱스3... 혹은 다른 게임과 함께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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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7시 40분 - 신작 정보는 친구 책상에서 얻는다
학교에 도착한 철수는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같은 반 영수 자리부터 찾아갔다. 영수는 조용히 구석자리로 이동해 비밀 거래라도 하는 양 이번 달 게임잡지를 꺼냈다. 파랜드 택틱스3 공략이 실려있다는 말을 듣고 떡꼬치를 대가로 가져와달라 부탁했기 때문이다.
둘은 쉬는 시간마다 모여 책상 하나에 머리를 맞대고 잡지를 펼쳐 들었다. 지금이라면 게임 이름 몇 글자만 검색해도 공식 영상부터 실제 플레이와 엔딩 후기까지 몇 분 안에 줄줄이 볼 수 있었지만 17세 철수와 영수의 세상에선 게임 잡지에 신용카드보다 작게 찍힌 스크린샷 몇 장과 장문의 글을 보며 상상력을 발휘하는게 최신 소식이었다.
최근 철수네는 천리안, 영수네는 나우누리를 사용하게 됐지만 둘 다 전화비 때문에 부모님들이 철저히 감시하고 있어 사용도 쉽지 않은데다 게임잡지는 사진도 많고 읽을거리도 많은데다 공짜 게임도 주니 항상 인기였다. 철수에겐 친구들의 입소문이 SNS고 게임잡지가 유튜브인 셈이다.
“야, 역시 파랜드 택틱스3로 사야겠다”는 철수의 결정을 듣고, 영수는 "내가 잡지 보여줬으니 너 해보고 나도 꼭 빌려주는거다?"라며 침을 바르기 시작했다. 오늘은 토요일이라 4교시까지만 마치면 학교가 끝나지만 철수의 정신은 이미 두 시간 전부터 용산에 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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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 12시 20분 - 4교시 끝, 오늘의 목적지는 집이 아니라 용산
4교시 수업 종료 종이 울리기 10분 전부터 철수와 영수는 선생님 몰래 가방 정리를 시작한다. 몇 달 만에 용산까지 나가는 만큼 새 게임도 사고 실컷 구경한 뒤, 집에서는 일요일까지 파랜드 택틱스3를 붙잡을 생각이었다.
원래 혼자 갈 생각이었지만 영수가 용산전자상가 굴다리에서 불량배들이 돈을 빼앗는다는 무시무시한 소문을 꽤 그럴듯하게 떠들었다. 양말이나 속옷에 숨긴 돈까지 알차게 찾아내 뺏는다는 얘기를 들으니 왠지 불안했다. 영수는 혹시 불량배를 만나면 자신이 먼저 몸으로 막을테니 넌 먼저 도망가라는 말로 동행을 제안했다.
사실인지 과장인지 철수가 확인할 방법은 없었지만 몇 달 동안 모은 게임값을 걸고 직접 검증할 이유도 없었다. 왕복 전철비와 도깨비상가 초입에 있는 포장마차에서 떡볶이와 어묵을 사주는 조건으로 철수는 영수와 거액의 즉석 민간경비 계약을 채결했다.
둘은 인천에서 용산으로 향하는 전철 안에서도 계속 파랜드 택틱스 이야기를 이어갔다. 2편에서 누가 좋았느니, 어떤 기술이 강했느니 떠들다 보니 생각보다 이동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용산역에서 내리자마자 철수는 가진 돈을 주머니, 양말, 가방 곳곳에 분산해 숨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혹시 불량배를 만나거나 인파에 섞여 헤어질 경우를 대비해 사람 왕래가 많은 1번 출구에서 4시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휴대폰이 급속도로 보급되는 시절이지만 철수와 영수는 삐삐조차 없었다.
다시 만나려면 미리 몇 시에 어디에서 보자고 약속하는 것이 가장 확실했다. 늦는 친구에게 어디쯤 왔냐고 카톡을 보내는 것도, 자신의 실시간 위치를 지도에 찍어 보내는 것도 철수에게는 아직 미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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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시 25분 - 용산 도깨비상가, 17살 철수에게는 이세계였다
학교부터 여기까지 계속 머리 속을 불안하게 했던 굴다리 불량배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거금으로 고용한 영수의 경호 실력은 시험조차 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오는 길에 게임 이야기를 실컷 하며 심심치 않게 왔으니 영수에게 먹일 떡볶이와 어묵 비용은 충분히 본전을 뽑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도깨비상가 입구에 서서 분산배치했던 돈들을 모아 오른쪽 뒷주머니에 꽂고 일부러 팔을 크게 휘둘러 심호흡을 몇 번해준다. 두 번째 방문부터 도깨비 상가 입장 전 마음을 가다듬는 철수만의 루틴이다. 영수에게도 "넌 아무소리하지 말고 내 옆에서 내 말에 고개만 끄떡거려 알았지?"라고 신신당부한다.
이 곳은 10대의 철수를 이세계로 들여보내주는 입구인 동시에 얼마 안되는 용돈을 바가지 당할 수 있는 마굴이었다. 중앙 통로를 중심으로 수많은 가게가 좌우에 붙어 있고, 초입부터 큼지막한 PC게임 패키지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야말로 보물의 산이지만 설레는 마음을 너무 드러내면 노련한 도깨비 상인들에게 순식간에 뜯어먹힐게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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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뭐 찾어? 우리가 제일 싸. 일단 들어와서 물어봐.”
상인 아저씨 한 명이 능숙한 손짓으로 철수를 붙잡는다. 처음 왔을 때라면 당황했겠지만 네 번째 방문인 철수는 일부러 시큰둥한 표정과 목소리를 연기하며 파랜드 택틱스3 가격부터 물었다.
"여기가 제일 싸다니까?" 라는 아저씨의 말을 들었지만 철수는 능숙하게 등을 돌렸다. 첫 번째 가게에서 들은 가격을 기억해둔 뒤 두 번째 가게로 가고, 다시 세 번째 가게까지 이동하며 가격을 묻는다. 옆 가게 주인 아저씨의 따가운 눈총도 무시하고 이 많은 가게를 모두 들를 기세로 발품을 판다. 몇 달 동안 모은 용돈으로 사는 게임인 만큼 몇천 원 차이도 철수에게는 절대 작은 돈이 아니었다.
2026년이라면 검색창에 게임 이름을 입력한 뒤 가격비교 버튼 하나만 누르면 판매처와 가격이 몇 초 만에 줄줄이 나타난다. 하지만 1999년 철수에게 가장 정확한 가격비교 서비스는 자신의 두 다리와 약간의 기억력이었다. 걸어다닌만큼 값이 싸지니 그야말로 발품이다.
검색 결과를 하나 더 보려면 몇 걸음 더 걸어야 했고, 최저가 정렬 대신 상인 아저씨와 직접 흥정을 해야 했다. “저쪽에서는 얼마라던데요”라는 말을 던졌을 때 계산기를 다시 두드리는 모습을 보는 것도 용산 쇼핑의 재미였다.
몇 군데 가격을 비교한 철수는 결국 가장 마음에 드는 조건을 제시한 가게에서 차비 명목으로 1000원만 더 깍아달라고 조르고 조른 후에야 거래가 성사됐다. 이제 몇 달 동안 차곡차곡 모아온 돈이 큼지막한 게임 패키지 하나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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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시 55분 - 게임이라는 것이 정말 물건이던 시절
아저씨가 선반에서 파랜드 택틱스3 패키지를 꺼내 건네자 철수는 여태까지 유지했던 냉정한 연기를 잊고 살짝 떨리는 양손으로 상자부터 받아 들었다. 모니터에서 봤던 캐릭터와 제목이 큼지막하게 인쇄된 패키지를 실제 손에 쥐는 순간만큼은 몇 달 동안 돈을 모은 보람이 있었다.
상자를 뒤집으면 스크린샷과 게임 소개가 있고 한쪽에는 자신의 컴퓨터에서 돌아가는지 판단할 수 있는 요구사양이 적혀 있다. 철수는 혹시 모르니 집 컴퓨터 사양을 머릿속에서 다시 맞춰본 뒤에야 마지막으로 안심했다.
요즘 게임이라면 자신의 PC 사양을 검색해 실제 플레이 영상과 평균 프레임까지 확인할 수 있다. 철수에게 주어진 것은 상자 뒤쪽에 적힌 사양 몇 줄과 집 컴퓨터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기억이 전부였다.
지금은 게임을 결제하는 순간 계정 라이브러리에 소유권이 등록되고 언제든 다시 다운로드할 수 있다. 그러나 철수에게 게임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이 상자와 그 안에 들어 있는 CD였고, 집에 무사히 가져가는 것까지가 구매 과정이었다.
게임이 여러 개 모이면 큼지막한 패키지들은 자연스럽게 방 한쪽 책장을 차지했다. 친구가 집에 놀러오면 라이브러리를 실행할 필요도 없이 책장만 한번 보여주는 것으로 어떤 게임을 좋아하는지 단숨에 설명할 수 있었다.
목적은 달성했지만 바로 집에 갈 생각은 없다. 몇 달 만에 용산까지 왔는데 달랑 게임 하나만 사고 곧장 집으로 향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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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10분 - 만 원이 남았으니 할인 코너도 한번 봐야 한다
철수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예상했던 게임값보다 만 원 정도를 넉넉하게 챙겨왔다. 파랜드 택틱스3를 사고도 약간의 여유가 생기자 자연스럽게 가게 한쪽에 마련된 할인 패키지 코너로 발길이 향했다.
최신작들이 번쩍이는 진열대에 있는 것과 달리 할인 코너에는 출시된 지 몇 년 지난 게임들이 빼곡하게 쌓여 있었다. 한때 잡지에서 몇 번이고 들여다봤던 게임이 지금은 다른 패키지 사이에 눕거나 비스듬히 꽂혀 헐값에 팔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일부는 약간의 먼지도 쌓여있지만 철수에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패키지 상태가 무슨 상관인가? 게임만 잘되면 되지...
그러다 철수의 눈에 '워크래프트'가 들어왔다.
1994년에 등장해 국내 PC게이머들에게도 이름을 크게 알린 게임으로, 철수 역시 몇 년 전 잡지를 보면서 한번쯤 제대로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작품이었다. 방금 게임만 잘되면 된다고 생각했음에도 습기를 머금은 듯 약간 우그러진 패키지와 약간 황색으로 변색된 오크와 휴먼의 얼굴을 보자 할인된 가격임에도 선뜻 손이 나가지 않는다.
예전에는 그렇게 갖고 싶었던 게임인데 싸졌다고 하니 오히려 사고 싶지 않은 이 기분은 대체 뭘까. 철수는 상자를 앞뒤로 한번 뒤집어본 뒤 다시 할인 코너 한쪽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할인 코너를 한참 뒤적이던 철수의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영수가 2시를 넘기자 급격히 배고파진 모양이다.
“야, 요즘 지나간 게임을 누가 돈 주고 사냐? 잡지 사면 주는데. 얼른 나가자.”
1999년쯤이면 게임잡지들의 부록 경쟁도 한창 뜨거워진 상태였다. 몇 년 전 정가를 주고 사야 했던 정품 게임들이 어느 날 잡지 한 권을 샀더니 CD째 따라오는 일도 더 이상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해 3월에는 PC게임매거진 부록으로 '워크래프트'가 제공됐고, 전년도에는 철수가 좋아했던 '파랜드 택틱스2'조차 잡지 부록으로 등장했다. 몇 년 지난 PC게임을 굳이 돈 주고 사야 하느냐는 인식이 생길 만한 환경이 이미 만들어지고 있었다.
듣고 보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철수도 정신을 차려보니 허기가 몰려왔다. 다시 한번 할인 코너를 훑어본 뒤 아쉬움 반, 수긍 반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 같았으면 싸게 나온 게임 하나를 더 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신났테지만 잡지값에 정품 게임까지 딸려오는 세상을 몇 년 경험하다 보니, 오래된 패키지를 돈 주고 사는 것 자체가 묘하게 손해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철수는 남은 돈으로 다음달 마음에 드는 번들 게임을 주는 게임잡지를 사겠다고 마음먹고 도깨비 상가를 나왔다.
당시에는 그저 학생들의 얄팍한 소비 심리처럼 보였겠지만 이런 풍경은 훗날 한국 PC 패키지 시장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장면이 됐다. 정품 게임을 통째로 얹어주던 게임잡지의 부록 경쟁은 게이머에게는 축제였지만 게임 하나의 가격을 바라보는 기준도 빠르게 바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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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50분 - 경호비를 지급할 시간
무사히 게임도 샀고 할인 코너까지 실컷 뒤졌으니 이제 영수에게 약속했던 경호비를 지급할 차례였다. 둘은 도깨비상가 초입 포장마차에서 떡볶이와 어묵을 주문한 뒤 늦은 점심을 대신해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영수는 2개 째 어묵을 손에 들고 계속 파랜드 택틱스3 패키지를 들여다봤다. 결국 참지 못하고 여기서 한번 열어보자고 했지만, 철수는 새 게임의 비닐을 벗기는 순간만큼은 집에 가서 혼자 천천히 즐기겠다며 거절했다.
27년 뒤에는 새 게임이나 굿즈의 포장을 뜯는 모습이 '언박싱'이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콘텐츠가 된다. 오늘은 파랜드 택틱스3 언박싱 영상의 예상 조회수는 철수 단 한 명이다. 그래도 새 패키지 비닐을 처음 뜯는 순간의 만족감만큼은 수백만 조회수 영상에도 별로 뒤지지 않을 것이다.
둘은 떡볶이를 다 먹은 뒤에도 바로 역으로 향하지 않고 주변 가게를 조금 더 돌아봤다. 철수는 일부러 패키지가 들어있는 비닐봉투를 크게 흔들며 걸었다. 지나치는 사람들 대부분이 바스락거리는 제법 큰 비닐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거지만 철수는 그들이 내 최신 게임을 보면서 부러워하는거 같아 내심 기분이 좋았다.
철수도 영수도 딱히 뭔가 살 생각은 없었지만 언제 다시 용산을 오겠냐는 마음으로 새로 나온 게임 패키지도 구경하고 PC 부품 가격도 기웃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세상 온갖 케이블은 다 모아놓은거 같은 케이블 노점상도 한참을 들여다본다. 딱히 뭔가 사질 않아도 신기한 것이 잔뜩 있어 즐거운 곳이 용산 아니던가.
한 시간 남짓 이곳저곳 구경하다보니 영수가 집에 가야되는듯 진짜 가자며 귀가를 재촉하자 철수도 별다른 미련 없이 뒤를 따랐다. 몇 달 만의 용산 구경도 충분했고, 무엇보다 손에는 오늘 이곳까지 온 가장 큰 이유가 이미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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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 40분 - 게임 패키지를 들고 다시 인천으로
돌아가는 전철에서도 철수는 몇 번이나 패키지를 손에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고 있다. 영수와 혹시 가는 길에 비라도 내리면 물 먹지 않게 품에 꼭~ 안고 뛰어야 하는거 아니냐, 만약 시디에 기스라도 있어서 설치 안되면 어쩌냐, 혹시 전철 안에 두고 내리기라도 하면 안되니 꼭 끌어안고 가라 등등 시덥지 않은 대화를 하며 낄낄거렸다.
지금이야 게임이라는 것이 계정에 로그인해서 설치하면 그만이지만 1999년은 CD에 문제가 생기면 게임을 할 수 없었고, 때때로 매뉴얼에 정품을 인증하는 암호키가 있는 경우도 있어서 작은 실수만으로도 비싼 돈을 주고 구입한 게임을 즐기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생겼다.
게임이 '물건'이었다는 말은 단순히 패키지가 존재했다는 의미만은 아니었다. 구입하고 보관하고 친구에게 빌려주고 다시 돌려받는 모든 과정에서 게임은 언제나 실제 손에 잡히는 물건으로 존재했다.
철수는 전철 안에서 오늘 본 게임들에 대해 영수와 다시 이야기를 나눴다. 조금 전 할인 코너에서 내려놓은 워크래프트 이야기가 나오자 영수는 다음에 잡지 부록으로 비슷한 게임이 나오면 자기가 빌려주겠다며 큰소리까지 쳤다.
대신 철수가 엔딩보면 꼭 빌려달라는 아까의 약속을 다시한번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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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 50분 - 새 게임의 시작은 비닐을 뜯는 것부터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어머니의 “또 게임 샀어?”라는 목소리가 철수를 맞았다. 어머니의 신작 탐지 능력만큼은 인터넷이 없어도 정확했지만, 오늘 철수는 잔소리를 상대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대충 얼버무리며 빠르게 방으로 들어온 철수는 컴퓨터 전원을 누른 뒤 용산에서부터 참아왔던 패키지 비닐을 조심스럽게 벗겼다. 상자를 열고 메뉴얼과 CD를 꺼내 드라이브에 올려놓자 기다리던 게임이 마침내 자신의 컴퓨터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요즘처럼 출시 전날 게임 파일을 미리 내려받는 프리로드도 없고, 밖에 있는 동안 집의 PC에 원격으로 설치를 걸어놓을 수도 없다. 게임을 사서 집까지 가져온 뒤 CD를 넣고 설치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과정도 당연히 플레이 시간의 일부였다.
기다리는 시간동안 철수는 경건한 마음으로 메뉴얼을 펼쳐 캐릭터 그림과 조작법을 뚫어질 듯 자세히 살펴봤다. 게임을 설치하는 몇십 분조차 그냥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라 새 게임의 세계를 미리 들여다보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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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 20분 - 포가튼 사가의 상처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설치가 끝나자 철수는 곧바로 게임을 실행하려다 잠시 손을 멈췄다. 머릿속에서 2년 전 포가튼 사가의 기억이 떠오르며 혹시 필요한 패치가 있는지 먼저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수는 01420을 눌러 천리안 연결을 시도했다. 뚜뚜뚜~ 삐이이이~ 하는 특유의 기괴한 접속음이 방 안에 울렸다. "또또 오자마자 인터넷부터 하지! 엄마 전화 써야돼!" 문 밖에서 엄마의 짜증섞인 목소리가 또 들렸지만 "잠깐만 보는거야..." 라며 내심 침착한 척 대답한다. 인터넷을 사용하는 동안 집 전화 이용이 안되는 풍경도 당시에는 특별히 이상할 것이 없었다.
자료실과 관련 정보를 뒤져 자신이 설치한 게임에 필요한 파일이 있는지 확인했다. 2026년에는 게임 실행기가 버전을 확인하고 필요한 업데이트를 알아서 내려받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철수에게 패치는 게임이 알아서 찾아주는 것이 아니라 이용자가 직접 존재 여부부터 알아내야 하는 별도의 물건에 가까웠다.
어떤 버전인지 살펴보고 필요한 파일을 직접 내려받은 뒤 설명대로 적용하는 과정까지 모두 이용자 몫이었다. 포가튼 사가에 호되게 당했던 철수에게는 귀찮더라도 건너뛰고 싶지 않은 일종의 게임 시작 의식이 되어 있었다.
다행히도 실행관련 패치는 없었지만 잔소리까지 들은 보상심리로 파랜드 택틱스3 정보를 좀 찾아볼까 하다가 어머니가 방문 밖에서 전화를 써야하니 인터넷을 빨리 끝내라는 재촉에 접속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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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 50분 - 내가 알던 파랜드 택틱스가 아니네?
모든 준비를 끝낸 철수는 마침내 파랜드 택틱스3의 실행 버튼을 눌렀다. 오프닝을 지나 캐릭터들이 등장하고 본격적인 게임이 시작되자 철수는 기대했던 새로운 모험이 시작됐다는 생각에 곧바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조금 진행하다 보니 이상한 점이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전작처럼 전장을 한눈에 보며 캐릭터를 움직이는 방식이 아니라, 마을과 필드를 돌아다니다 적을 만나면 턴을 주고받는 일반적인 일본식 RPG에 가까웠다. 철수는 혹시몰라 몇 번이나 읽었던 패키지 제목을 다시 쳐다본다.
“어? 3편 맞는데?”
실제로 파랜드 택틱스3의 원제는 '파랜드 오딧세이'였고 국내에서 파랜드 택틱스라는 제목을 달고 출시된 작품이었다. 기존 1·2편과 같은 방식의 직접적인 후속작을 기대했다면 첫인상부터 당황할 만한 변화였다.
요즘이라면 이런 사실은 게임을 사기 전에 이미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출시 전 플레이 영상부터 리뷰와 커뮤니티 게시물이 쏟아지는 만큼 장르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모르고 구매하기가 오히려 더 어렵다.
하지만 철수가 접한 정보는 게임잡지와 친구들의 이야기가 중심이었고, 제목에는 너무나 당당하게 파랜드 택틱스3라고 적혀 있었다. 1편과 2편을 재미있게 했던 17살에게 그 이름보다 강력한 구매 추천 문구가 따로 있을 리 없었다.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철수는 금세 게임 자체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전작과 방식이 다를 뿐 캐릭터를 만나고 이야기를 따라가며 전투에서 새로운 기술을 확인하는 재미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니까.
무엇보다 몇 달 동안 용돈을 모아 용산까지 가서 산 게임이다. 시작한 지 한 시간도 안 돼 취향이 아니라며 삭제하고 환불 버튼을 누른다는 선택지는 철수의 세계에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용산까지 가봐야 비닐까지 뜯은 게임을 환불해줄리 없다.
비싸게 산 게임이면 아무리 재미없어도 재미있게 해야만 한다.
어느새 몇 시간을 플레이했지만 철수에게 게임을 끌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전투를 반복하면서 캐릭터마다 어떤 방식으로 싸우는 것이 좋은지 감이 잡혔고, 처음에는 생소했던 시스템도 점점 손에 익기 시작했다.
문제는 한번 막히기 시작하면 바로 답을 얻을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것인데 실패하면 다시 불러오고 또 실패하면 방법을 조금 바꿔 될 때까지 도전해본다. 지금 생각하면 상당히 비효율적인 방법이지만 철수에게는 그것이 게임을 푸는 당연한 과정이었다.
누군가 발견한 최고의 공략이 몇 시간 만에 모든 이용자에게 공유되는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친구끼리 가진 게임 지식도 조금씩 달랐다. 월요일 학교에 가서 “거기 어떻게 깼냐”고 묻는 대화가 자연스럽게 새로운 정보 교환의 시작이 됐다.
하지만 이번 주말에는 월요일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내일이 일요일이니 철수는 오늘 실패한 부분이 있더라도 자고 일어나 다시 하루 종일 붙잡아볼 생각이었다.
저녁 식사도 허겁지겁 먹어치우고 게임만 계속 달려온 철수도 이제 조금씩 눈이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처음 산 게임을 조금 피곤하다고 멈출 수야 없지! 한 구간만 더 진행하기로 하고 중요한 순간마다 저장 파일부터 확인했다.
저장한 데이터는 철수의 컴퓨터 안에 있을 뿐 다른 장소로 자동 전송되지 않는다. 내일 다른 친구 집에서 오늘 하던 게임을 이어하려면 세이브파일을 직접 찾아 플로피디스크 같은 저장매체에 담아 가져가야 했다.
클라우드에 세이브파일이 저장되고 어느 PC에서 로그인해도 그대로 이어지는 것은 아직 먼 미래 이야기였다. 가끔 아무 생각없이 키보드를 두들기다 PC에 저장된 세이브 데이터를 지우면 수십 시간 동안 키운 캐릭터와 저장 데이터가 함께 사라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면 눈물을 머금고 새로 플레이해야만 한다.
12시가 거의 다 됐을 무렵 문 틈으로 새나가는 불빛을 본 어머니가 컴퓨터를 끄라고 말하자 철수는 마지못해 컴퓨터의 전원 메뉴를 클릭했다.
'이제 컴퓨터 전원을 끄셔도 됩니다.'
철수는 모니터를 가득채운 붉은색 글씨를 보고 전원 버튼을 눌렀다. 잠시후 웅웅거리며 귓가에 조용히 들리던 작동음이 멈추고 방 전체가 갑자기 이질감이 들 정도로 조용해졌다. 방 안이 어색할 정도로 조용해지자 학교와 용산을 돌아다닌데다 긴 시간 같은 자세로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 본 철수에게 졸음이 쏟아진다.
"카인이 쎈거 같은데 카인을 중심으로 파티를 짜봐야겠다..."
철수는 침대에 몸을 던지듯 누이면서 내일 플레이할 내용을 생각하며 잠들었다.

그림=AI이미지
27년 후 2026년 9월...
그리고 27년이 지난 2026년
44세가 된 철수는 꽤나 오랜만에 일과 가족들의 굴레에서 벗어나 혼자가 됐다. 몇 달만의 찾아 온 자유로운 주말을 만끽하기 위해 서재의 컴퓨터로 스팀에 접속한다. 세일 때 사두기만 했지만 플레이하지 못한 게임들을 즐길 심산이었다. 스팀 라이브러리에 들어가 마우스 휠을 스륵스륵 돌려 백 개가 넘는 게임을 훑어봤지만 "아~ 할 게임 없네"라고 말하며 상점에 들어가 세일하는 게임이 있는지도 확인한다.
정신없이 바쁠땐 그렇게 생각나던 게임이었는데 막상 시간이 남으니 약간 귀찮은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살짝 마음이 바뀐 철수가 크게 기지개를 켜며 시선을 돌린 순간, 서재 책꽂이 제일 위에 빛바랜 파랜드 택틱스3 패키지가 보인다. 워낙 재미있게 한 게임이라 나름 고이 간직했다곤 해도 몇 번의 이사와 결혼을 거치며 어느사이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았을 녀석이 꽤 운이 좋았는지 지금도 서재 책꽂이 제일 위에서 소복이 먼지를 먹고 있었다.
문득 1999년 용산에 갔던 추억이 떠올랐다.
이제는 게임 하나 사겠다고 용산까지 갈 필요도 없고, CD-ROM 드라이브도, 상당히 시끄럽게 존재감을 뽐내던 PC통신도 컴퓨터에서 사라졌다. 게임잡지를 돌려보며 신작 정보를 얻거나 전화선을 붙잡고 패치 자료실을 헤맬 이유도 더 이상 없다.
그래도 어느 날 오래된 책장 구석에서 빛바랜 PC게임 패키지 하나를 발견한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질지도 모른다. 큼지막한 종이상자를 손에 드는 순간만큼은 다시 1999년 9월 11일 토요일의 17살 철수로 돌아간거 같았다. 힘들게 얻고 힘들게 플레이 한 게임은 잠시 잊을지언정 영원한 추억으로 자리 잡는다.
4교시가 끝나자마자 교문을 뛰쳐나와 떡볶이와 어묵으로 친구를 꼬드기고, 굴다리를 지나 수많은 게임 패키지가 쌓인 용산을 몇 시간이고 헤집고 다녔던 날이다. 그리고 돌아온 뒤에는 작은 모니터 속 캐릭터들과 함께 자정까지 주말 절반을 통째로 불태웠던 바로 그 토요일이 아직도 생생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44세가 된 철수는 갑자기 생각났다.
"아! 영수한테 게임 안 빌려줬었네..."

그림=AI이미지
[배향훈 기자 tesse@chosun.com ] [gamecho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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