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믹마켓] 일본 팬덤을 움직인 한국 게임, C108에서 확인한 한국 서브컬처의 힘](https://www.gamechosun.co.kr/dataroom/article/20260817/224291/808178_1786946275.jpg)
※ 기사에 게재된 동인 서클 및 배포물 사진은 각 서클 관계자의 사전 허가를 받아 촬영했으며 그 외 관람객은 모자이크 처리를 진행하였습니다.
도쿄 빅사이트에 들어서자 코믹마켓 특유의 풍경이 곧바로 시야를 가득 채웠다. 통로를 메운 참가자와 빼곡하게 늘어선 동인 서클, 캐릭터의 의상과 소품을 재현한 코스플레이어, 눈에 띄는 전시물을 발견할 때마다 일제히 높이 들어 올리는 카메라까지. 이번 제108회 코믹마켓(이하 C108)은 여전히 코믹마켓이 세계 최대 규모의 서브컬처 행사로 불리는 이유를 어렵지 않게 보여줬다.
하지만 이번 행사에서 특히 인상적으로 다가온 것은 일본 콘텐츠만의 저력이 아니었다. 행사장 곳곳에서 한국 서브컬처 게임이 차지한 존재감과 이를 자신의 방식으로 다시 해석하는 일본 팬들의 반응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흔히 서브컬처 분야에서 동아시아 3국의 의의를 이야기하면 일본은 서브컬처의 원류로서 소비 문화를 구축했고, 중국은 게임을 중심으로 산업 규모와 기술적 기준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내리곤 한다.
그렇다면 한국의 역할은 무엇일까. C108에서 확인한 한국 게임의 강점은 팬덤의 높은 호응도와 자유로운 재해석이 가능한 기조를 바탕으로 캐릭터와 이용자의 관계를 빠르게 확장하는 능력이었다.
일본이 캐릭터를 사랑하고 소비하는 문화를 만들고 중국이 이를 거대한 산업으로 구현했다면, 한국은 팬덤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캐릭터를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데 강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 코믹마켓은 이러한 커뮤니티 친화적인 한국 게임 시장의 특성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행사였다.
■ 1,886개의 서클, 숫자로 증명된 블루 아카이브의 화력

한국 게임의 영향력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지점은 역시 2차 창작이었다. 코믹마켓 공식 웹 카탈로그에는 참가 서클의 장르와 배치 정보가 수록돼 있어 이용자들은 이를 바탕으로 행사별 장르 규모를 자체적으로 집계하고 분석할 수 있다.
직전 행사인 2025년 겨울 C107에서는 '블루 아카이브'가 1,886개의 참가 서클을 기록하며 가장 큰 단독 장르로 집계됐는데, 2위인 '아이돌마스터'가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922개, 3위인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가 828개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블루 아카이브의 화력은 더욱 선명해진다. 두 작품의 수치를 합쳐야 비로소 블루 아카이브와 비슷한 수준에 도달할 정도다.
C108 현장에서 체감한 분위기도 숫자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블루 아카이브 구역에는 캐릭터 일러스트집부터 만화, 굿즈, 음악과 각종 실험적인 창작물까지 다양한 형태의 작품이 늘어서 있었다. 같은 캐릭터를 다루더라도 서클마다 해석과 표현 방식은 완전히 달랐다.

특정 캐릭터가 웬만한 단독 작품을 넘어서는 사례도 나왔다. 최근 한국·글로벌 서버에서 ‘데카그라마톤 결전'과 함께 실장된 포커스 캐릭터 '텐도 케이'를 중심으로 한 서클은 C108 카탈로그의 캐릭터별 등록 기준으로 135개에 달했다.
하나의 게임도, 하나의 학교도 아닌 캐릭터 한 명이 100개가 넘는 서클의 창작 주제가 됐다는 의미다. 웬만한 중소 규모 작품 전체보다 많은 창작자를 움직였다는 점에서 블루 아카이브 팬덤이 캐릭터를 소비하는 밀도와 속도를 짐작할 수 있다.
블루 아카이브의 성공은 단순히 일본 학원물의 문법을 충실하게 사용한 결과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캐릭터의 관계와 일상, 이용자가 상상할 수 있는 여백을 끊임없이 제공했고, 공식 콘텐츠에서 시작된 감정과 농담이 팬아트와 만화, 음악, 밈을 거쳐 다시 게임으로 돌아오는 순환 구조를 만들었다.
일본 팬덤은 블루 아카이브를 더 이상 외국에서 건너온 게임으로만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신들이 직접 이야기를 덧붙이고 캐릭터를 재해석할 수 있는 하나의 창작 기반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 도쿄 빅사이트 한복판에서 울려 퍼지는 한국어 "쪼아요, 쪼아요, 물걸레질 쪼아요"

이러한 현상을 가장 유쾌하게 보여준 곳은 '트릭컬 리바이브' 부스였다. 부스를 둘러싼 수많은 일본인 참가자가 한국어로 "쪼아요, 쪼아요, 물걸레질 쪼아요"를 외치는 광경은 쉽게 잊기 어려웠다.
‘순수악이지만 그렇게까지 미워할 수 없는 철부지’로 요약되는 스피키의 캐릭터성과 여기서 파생된 밈이 일본 팬덤에 고스란히 전해졌고 스피키다움을 제대로 살리려면 해당 대사를 반드시 한국어로 읊어야 한다는 독특한 현상으로 이어진 것이다.
일반적으로 해외 진출은 현지화라는 과정을 통해 원작의 표현을 현지 언어와 문화에 맞게 바꾸는 작업을 동반한다. 그러나 트릭컬의 사례는 정반대였다. 일본 팬들이 한국어의 발음과 리듬까지 하나의 놀이로 받아들이며 원본을 직접 따라 하고 있었다.
밈은 회사가 비용을 들여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광고 문구가 아니다. 팬덤이 캐릭터를 이해하고 자발적으로 반복할 때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 팬들이 코믹마켓 한복판에서 한국어를 외친 장면은 트릭컬이라는 작품의 캐릭터성과 유머가 국경을 넘어 공유되고 있다는 상징적인 증거였다.
한국 서브컬처 게임이 가진 장점도 이 지점에 있다. 업데이트와 공식 방송, 커뮤니티의 반응이 짧은 주기로 맞물리고, 이용자가 만들어낸 표현이 다시 공식 콘텐츠에 영향을 미친다. 팬은 단순한 구매자가 아니라 캐릭터의 이미지를 함께 만들어가는 참여자가 되는 것이다.
■ 출시 전부터 줄을 세운 아스오라

한국 게임에 대한 기대감은 이미 흥행에 성공한 작품에만 머물지 않았다. C108에서 이를 가장 인상적으로 보여준 작품은 '아스트라에 오라티오', 이른바 '아스오라'였다.
아스오라는 아직 정식 출시 전인 데다 게임의 구체적인 형태나 콘텐츠가 충분히 공개되지 않은 작품이다. 그럼에도 부스에서 판매한 아트북을 구매하기 위해 상당한 규모의 대기열이 형성됐다. 행사장 천장에 걸린 대형 광고 아래로 참가자들의 발길이 이어졌고, 공개된 정보가 제한적인 신작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의 관심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출시 전 게임의 전시는 시연이나 현장 이벤트, 유명 코스플레이어와 한정 굿즈 등을 통해 관람객을 끌어모은다. 반면 아스오라 부스에서 관람객이 직접 손에 넣을 수 있었던 핵심 콘텐츠는 작품의 세계와 캐릭터를 담은 아트북과 굿즈 뿐이었다. 게임을 직접 플레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참가자들은 작품의 시각적 설정과 초기 자료를 소유하기 위해 기꺼이 긴 줄에 합류했다.
이는 아스오라가 단순히 화려한 캐릭터 일러스트로 순간적인 시선을 끌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아직 완성된 게임을 경험하지 못한 팬들이 캐릭터의 관계와 세계관을 먼저 들여다보고, 공개되지 않은 부분을 스스로 상상하려 했기 때문이다. 아트북을 향한 수요는 작품의 비주얼이 감상의 대상을 넘어 팬덤이 해석하고 공유할 수 있는 창작의 재료로 받아들여졌다는 증거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일본 현지에서도 아직 인지도를 쌓아나가는 중인 미출시 한국 게임이 코믹마켓 한복판에서 이 정도의 대열을 만들었다는 점이 중요한 지점이다. 기존 IP의 인지도나 장기간 축적된 서비스 성과에 기대지 않고도 캐릭터와 미술 설정만으로 초기 팬덤을 움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 전시장을 넘어 동인과 코스프레로 퍼진 니케

'승리의 여신: 니케'의 존재감도 상당했다. 니케는 특정 기업 부스에 관람객이 몰리는 수준을 넘어 동인 서클과 코스프레, 굿즈와 참가자들의 쇼핑백까지 행사장의 서로 다른 구역에서 반복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사실 C108에서 니케는 블루 아카이브처럼 독립 장르 코드를 부여받은 작품이 아니라 '게임(네트워크·소셜)'이라는 대분류에 포함돼 있다. 이 때문에 장르 코드만으로는 참가 서클의 정확한 규모나 다른 작품과의 격차가 한눈에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행사장을 직접 돌아다니며 체감한 인기는 카탈로그의 분류 방식과는 전혀 달랐다.
동인 구역에서는 니케 캐릭터를 중심으로 한 일러스트와 만화, 팬 굿즈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고, 코스프레 구역에서도 특유의 의상과 무기, 캐릭터의 자세를 재현한 참가자 주변으로 자연스럽게 카메라가 모였다. 특정 구역을 벗어나도 캐릭터가 인쇄된 가방과 상품을 든 참가자들이 계속 눈에 들어올 정도로 작품의 영향력이 행사장 전반에 퍼져 있었다.

이는 니케가 일본 시장에서 단순히 높은 매출을 기록한 한국 게임을 넘어 팬들이 직접 캐릭터를 그리고, 입고, 소유하고 싶어 하는 IP로 자리 잡았다는 의미다. 공식 전시의 규모보다 팬이 직접 만들어낸 결과물이 얼마나 넓게 흩어져 있는지가 중요한 코믹마켓의 특성을 고려하면 더욱 의미 있는 모습이었다.
니케가 2차 창작과 좋은 궁합을 보이는 첫 번째 이유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강한 캐릭터 디자인이다. 실루엣과 복장, 무기, 표정만으로도 인물을 구분할 수 있고 전투 방식과 소속 부대의 특징이 외형에 직접 반영된다. 일러스트 한 장이나 코스프레 사진만으로도 캐릭터의 정체성을 전달하기 쉬운 구조다.
하지만 시각적인 매력만으로 지금과 같은 팬덤을 장기간 유지하기는 어렵다. 니케는 강렬한 첫인상 뒤에 캐릭터마다 비극과 갈등, 관계와 성장 서사를 지속적으로 축적해왔다. 외형에 이끌려 작품을 접한 이용자가 이야기를 통해 캐릭터에 감정을 이입하고, 그 감정을 다시 그림과 만화, 코스프레로 표현할 수 있는 흐름을 만든 것이다.
특히 니케는 공식 콘텐츠와 팬 창작이 서로 다른 공간에서 따로 움직이지 않는다. 새로운 이야기와 의상, 캐릭터가 공개될 때마다 팬아트와 밈, 코스프레가 빠르게 등장하고, 업데이트 사이의 공백을 팬덤이 만들어낸 콘텐츠가 채운다. 이러한 순환은 캐릭터의 화제성을 단기간의 픽업이나 이벤트에 가두지 않고 장기적인 IP 자산으로 전환하는 모범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 한국 게임의 경쟁력은 팬과 캐릭터 사이의 왕복에 있다

C108의 기업 부스와 동인 구역, 코스프레 공간을 차례대로 지나며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 서브컬처 게임은 일본의 성공 사례와 문법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길을 개척했다는 것이었다.
한국 게임은 일본에서 만들어진 캐릭터 소비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지만, 온라인게임과 라이브 서비스 운영을 통해 다른 방식의 관계를 발전시켰다. 빠른 업데이트와 공식 방송, 커뮤니티 반응, 오프라인 이벤트가 맞물리며 캐릭터를 지속적으로 변화시키고 팬덤의 감정을 실시간에 가깝게 반영한다.
물론 단순히 커뮤니티에서 유행하는 표현을 공식 계정이 따라 사용한다고 해서 그것이 고스란히 팬 친화적인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캐릭터의 성격과 관계가 일관되게 축적되고, 팬들이 자유롭게 상상할 여백을 남겨둘 때 비로소 밈과 2차 창작이 작품의 수명을 연장하는 자산으로 바뀐다.
블루 아카이브와 니케는 이미 그 가능성을 성과로 증명했다. 트릭컬은 한국 커뮤니티에서 태어난 언어와 유머가 해외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고 아스오라는 출시 전부터 팬이 움직일 수 있는 비주얼과 캐릭터의 힘을 확인시켰다.
일본이 서브컬처를 사랑하고 소비하는 거대한 장을 만들었고 중국이 자본과 기술을 통해 그 장의 크기를 키웠다면, 한국은 캐릭터와 팬 사이의 왕복 속도를 높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C108은 한국 게임이 일본 시장에서 얼마나 많이 팔리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행사에 그치지 않았다. 일본의 창작자와 이용자가 한국 게임의 캐릭터를 자신의 언어로 다시 그리고, 굿즈로 만들고, 의상으로 재현하며, 때로는 한국어로 밈을 외치는 현장이었다.
한국 서브컬처 게임의 다음 가능성도 바로 여기에 있다. 좋은 캐릭터를 보여주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팬이 그 캐릭터를 가지고 놀고, 해석하고, 다시 작품에 돌려줄 수 있는 관계를 만드는 것. C108에서 펼쳐진 긴 줄과 수많은 카메라, 1,886개의 서클과 "쪼아요"라는 외침은 그 가능성이 이미 국경을 넘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신호현 기자 hatchet@chosun.com] [gamechosu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