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는 주연과 조연, 다양한 등장인물이 있듯이 게임에서도 다양한 캐릭터가 등장해 게이머의 몰입감을 높여줍니다. 특히, 대작이라 평가받는 게임은 영화 이상의 스토리와 캐릭터성으로 많은 게이머들에게 여전히 회자되는 대상이기도 합니다.작품 밖에는 기획자, 프로그래머, 일러스트레이터 등 게임이라는 세상을 탄생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개발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피땀 흘려 만든 게임은 게이머에게 때론 웃음을, 때론 눈물을 선사하며 일상의 피로를 잠시 잊게 만들어 줍니다.
때론 주인공, 때론 친구, 때론 적으로 등장하는 캐릭터부터 게임이라는 세상을 탄생시킨 개발자들까지 게임에 관련된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했습니다.[편집자 주]
대전 격투 장르의 게임 시리즈가 한창 인기를 끌던 9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스토리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다. '어떻게 상대를 요리해야 잘 요리했다는 소문이 날까', '어떤 캐릭터가 성능이 좋고 나쁜가'가 주요 관심사였으며 보통 CPU와 연속 대전을 진행하는 아케이드 스토리 모드는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놈이 설정상 가장 강하거나 나쁜 놈이겠거니 하고 넘어가는 게 보통이었다.
그 와중에 대전 격투 게임계에서 '꺾이지 않는 악의 카리스마'로 독보적인 위치와 영향력을 자랑하시는 분이 있었으니 바로 오늘 소개해드릴 수령님... 아니 '베가 장군님' 되시겠다.
장군님께서는 데뷔작인 '스트리트 파이터 2'에서 선택 불가능한 보스로 처음 등장하신 이래로 대체로 시리즈 전통의 최종보스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본격적으로 서사가 정립되기 전까지의 장군님은 휘하 사천왕과 함께 게임 후반부에 등장하는 강력한 성능의 선택 불가능 CPU 보스에 불과했고 그냥 센놈이구나 정도의 인상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허나 시리즈가 장기화됨에 따라 '사이코 파워'라는 초능력을 가졌다는 설정이 추가되며, 베가는 수련이나 신체 개조 등을 통해 강해진 대부분의 스트리트 파이터 캐릭터와는 궤를 달리하는 노선 위에 있음이 밝혀지며 사돌루 조직을 창설하고 그 초능력을 지속적으로 세계 정복과 악행에 사용하는 악의 중심축이 됐다.
비록 '고우키'의 시리즈 첫 등장에 강한 임팩트를 주기 위해 마지막 스테이지에서 순옥살에 두들겨 맞고 쫓겨나는 가짜 최종보스가 되거나, 심심하면 부하들이 등돌리고 배신할 정도로 인사관리를 못한다는 추한 면모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 큰 덩치에 맞지 않게 날렵하고 호쾌한 기술 '헤드 프레스'나 '니 프레스'를 통해 상대를 오만하게 깔보고 짓밟는 캐릭터성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초능력자라는 설정을 잘 살린 공중전과 견제 특화 성능으로 덩치 큰 캐릭터는 무조건 파워 위주라는 선입견을 몸소 부수는 등 놀라운 활약을 보여주고 계신다.
뿐만 아니라 베가 장군님의 존재는 스트리트 파이터라는 시리즈의 이야기를 이어 나가기에 필수 불가결하다. 범죄 조직의 총수인 만큼 온갖 악행을 통해 인게임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등장인물들과 직간접적으로 원한 관계를 쌓고 있기 때문에 원래대로라면 자신의 활동 영역에서 벗어나지 않고 은둔하고 있었을 고수들이 합심하여 타도 베가의 깃발 아래 '위 아더 월드'를 외치며 세상 밖으로 나왔다.
반대로 악의 카리스마로 무장한 그에게 이끌려 나온 악당 캐릭터의 수도 결코 적지 않다. 실제로 그가 세운 악의 조직 '샤돌루' 외에도 시리즈 내에서 대놓고 악당이거나 뒤가 구린 캐릭터들은 대부분 베가 장군님과 반드시 접점을 가지고 있으며 작중 벌어진 모든 악행의 원흉이 누구냐고 한다면 일단 '베가, 네놈이 범인이구나!'라고 찍으면 대체로 정답이다.
심지어 악의 총수로 그 이름이 어찌나 널리 알려져 있는지 옆동네에서 같은 이름의 초능력을 사용하는 여고생 아이돌 파이터는 사이코 파워를 나쁜 일에 쓴다고 화를 내고, 갱생 덕후 정의의 태권도 사범은 대면하자마자 교화를 통한 갱생이 불가능함을 딱 잘라 말하고 숙청을 선언할 정도다.
그렇게 업보 스택을 쌓아왔기 때문에 베가 장군님께서는 은근 수난사도 많으시다. 앞서 언급한 고우키의 시리즈 첫 등장 당시 순옥살의 제물이 된 사건에 대해서는 대부분 장군님이 그냥 쓰러져서 리타이어한 정도로만 아는 사람들이 더러 있지만, 실제로는 그 당시 베가 장군님은 목숨을 잃었으며 이후로도 몇번이고 목숨을 잃었다가 악의 메시아답게 부활해서 돌아왔다는 설정이 붙어 있다.
물론 그 부활도 전세계 곳곳에 클론 제조 기술센터를 배치하고 미리 준비해 둔 클론 육체를 통해 돌아온다는 범상치 않은 방법이기 때문에 자아가 생겨난 일부 클론 육체들이 베가를 증오하고 해치우려 드는 악순환이 돌고 도는 판국이지만 장군님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늘도 악행 삼매경이다.
오히려 최근 들어서 대전 격투 게임이 본격적으로 내러티브를 중시하는 과정에서 '실은 사연이 있었다' 혹은 '진짜 목적을 숨기고 있는 좋은 녀석이었다'라고 세탁되는 경우가 은근히 많이 나오고 있는데 최소한 베가 장군님 정도의 도량(?)은 있어야 악의 최종보스를 칭하는데 부족함이 없지 않나 싶다.
클론의 예비 육체가 아니더라도 죽은 자를 무덤에서 되살리는 샤돌루단물 '싸이코 빠와'가 함께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베가 장군님의 최종 보스 신화는 영원하리라.
[신호현 기자 hatchet@chosun.com] [gamechosun.co.kr]